한번 잠들면 아침해가 밝아도 좀처럼 깨지 않는 것이 윤대협의 수면 습관이었다. 그러니 이 야심한 시간에 눈을 번쩍 뜨게 된 건 우연이라기보단 필연에 가까웠으며, 기적이라기보단 재앙이라 불러야 마땅할 터였다. 잠들기 전, 틀림없이 커튼을 닫아 두었던 것 같은데 활짝 열린 커튼과 창문 틈으로 달빛이 새어들었다. 그럼에도 컴컴한 자취방을 뒤덮은 어둠을 몰아내기엔...
1 잘못 들었을 거다. 바닷바람 풍부한 이 마을에선 종종 바람이 언어를 베어먹는 경우가 왕왕 있으니까. 폭탄 같은 발언을 던진 장본인의 얼굴을 깊게 살핀다. 아아. 잠시 상대가 그 서태웅임을 깜빡했다. 서태웅의 얼굴에 예쁘게 붙은 근육들은 대체로 날로 먹고 있는 것 같다. 늘 공놀이로 혹사시키는 목 아래 근육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꿀이지. 이렇다 할 표정...
1 봄이다. 연분홍 꽃잎이 앙상한 가지에 팝콘처럼 풍성하게 매달렸다가 살랑대는 바람의 손길에 우수수 떨어지는 계절. 찬 공기 위로 훈풍이 은근하게 내려앉는 계절. 두껍고 시커먼 옷을 벗어 던지고 겨우내 잃었던 색채를 비로소 되찾은 것처럼 일제히 알록달록한 옷으로 갈아입는 계절. 그리고 쓸데없이 사람 마음이 울렁울렁 멀미할 것처럼 요동치는 계절. 올해는 ...
윤대협은 인생이 우연의 연속이라 믿는 부류였다.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고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일은 전부 우연의 산물이라 믿는 사람도 있다. 서태웅은 전자였고, 윤대협은 후자였다. 열차 복도를 무념하게 걷던 윤대협은 웃었다. 이거 봐, 우연이 다 결정하는 거라니까.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특급 열차는 네 개의 좌석이 둘씩 마주하고 있는 형태...
“어, 프린스 듣네?” 건네받은 이어폰을 왼쪽 귀에 꽂은 윤대협은 가사의 한 소절이 끝나기도 전에 알은체했다. 커다란 몸을 가볍게 흔들며 박자를 따라 발끝을 까딱였다. 이따금 슬쩍 닿는 서태웅의 어깨에서 아직 내리지 않은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오늘도 쿨한 남자 서태웅을 뜨겁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요즈음 윤대협의 낙이었다. 아무것도 낚지 않는 낚시보다...
0. 1999년 12월 31일, 23시 59분 50초. 새천년을 맞이한다는 설렘에 잠식당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어느 해의 연말보다 들떴다. 카운트다운을 즐기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목청껏 숫자를 10부터 거꾸로 세기 시작했다. 무대 전광판에도 숫자가 거꾸로 흘러갔다. 0을 외치는 순간 군중 사이에서는 환호가 터져 나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행사 관계자들의...
“저랑 사귀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꾸벅 숙인 태웅의 동그란 머리꼭지를 보며 대만은 생각했다. 교제를 청하는 데 부탁드린다는 말이 붙는 게 맞아? 고백에는 전조가 있기 마련이다. 조금이라도 상대의 곁에 머무르고 싶고 조금이라도 상대를 눈에 담고 싶고. 그러다 보면 마음의 거리도 몸의 거리도 가까워진다. 대만의 기억 속 서태웅은 자신이 농구부로 돌아온 날...
DAY 1 여름이 절정으로 무르익어 가는 도중이었다. 플랫폼 지붕 틈새로 보이는 하늘이 눈부시게 맑았다. 햇빛이 하도 강렬해서 하늘은 푸르기보단 아주 옅은 레몬색에 가까웠다. 전철 안이라고 딱히 시원한 건 아니었으나 노선을 갈아타기 위해 플랫폼에 발을 딛자마자 상당한 습기를 동반한 7월 말의 열기가 전신을 흠뻑 적셨다. 아무리 더위를 덜 타는 편이라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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