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히 많은 별들 중 단 하나, 나의 별.
One of a kind 05




*




스팍과 커크는 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스팍으로서는 전혀 생각에도 없던 동행이었다. 커크는 '공식적인 외출'을 하는 것이 퍽 즐거운지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광을 마치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보는 사람처럼 열심히 눈에 담으려 애썼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스팍의 표정은 무겁기만 했다.
두 사람이 예정에 없던 외출을 하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흘 전 걸려온 통신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정말 해도 너무하는군.
"닥터? 제가 무슨 결례라도 범했습니까? 전후 사정 설명 없이 무턱대고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 제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먼저 연락할 줄 알고 가만히 기다렸더니,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던 거였구만.
"제가 연락을 드리겠다는 약속을 한 적이 있었습니까?"

통신기 너머의 목소리는 누구인지 짐작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맥코이의 것이었다. 스팍에게 사적으로 통신을 걸어오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쩐 일인지 잔뜩 심통이 나 있었는데, 스팍은 그 원인을 알지 못해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벌써 한 달이 다 돼 간다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랑은 만나게 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냔 말이야.

그는 들릴 듯 말 듯 하게 통신기 너머로 계속해서 구시렁거렸다. 맥코이는 목적어를 빼놓은 채 말하고 있었지만, 스팍은 금세 그가 하는 말의 의도를 알아챘다. 그는 스팍이 새로 데려온 커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의 중심에는 늘 커크가 있었고, 그것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스팍은 이것이 제 불찰임을 순순히 인정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맥코이에게는 진작 그를 보여줬어야 마땅했다. 생전에 커크와 가장 친했던 사람이기도 했거니와, 지금의 커크를 형성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기억까지 빌려준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미처 거기까지 고려하지 못했군요.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조만간 닥터의 시간이 괜찮으실 때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일요일 어때? 맘 같아선 당장 내일이라도 만나고 싶은데 빌어먹을 업무가 너무 많아서 토요일에까지 일을 나가야 한다고.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이런저런 사족 - 언제나 그렇듯 그는 맘에 들지 않는 일에 대해 늘 투덜거렸다 - 이 많이 붙긴 했으나, 결론은 사흘 후에 만나자는 것이었다. 마침 그날 스팍도 별다른 일정이 잡혀 있지는 않았으므로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약속 장소는 스팍이 정해 추후에 다시 연락하기로 했다. 처음 통신을 걸었을 때와는 달리 맥코이의 목소리는 많이 온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스팍이 제 의견에 꼬투리를 잡으며 이견을 제기하지 않았던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그보다도 다시 커크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의 기분을 한결 나아지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혼을 빼놓는 맥코이와의 통신을 마치고 스팍은 도시 근교에 위치한 레스토랑을 한 군데 물색했다. 사람이 많은 곳에 커크를 데리고 나갔다가 벌어질지도 모를 소동을 최대한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프라이빗 룸이 있었기 때문에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편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으리라는 계산을 끝냈다. 그리하여 오늘의 삼자대면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었다.



레스토랑에 도착해서 차에서 내릴 때, 스팍은 커크에게 미리 챙겨 온 모자를 써 줄 것을 요구했다. 도심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으로, 커크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있을 확률은 극히 희박했지만, 그래도 스팍은 모든 걸 철저히, 그리고 확실히 하고 싶어 했다. 얼마 전의 '사건'도 있었기 때문에 커크는 군말 없이 모자를 푹 눌러 썼다. 앞장서는 스팍의 뒤를, 커크는 고개를 푹 숙이고 졸졸 따라 걸었다. 그의 시선은 스팍이 미리 예약해 둔 프라이빗 룸에 들어갈 때까지 줄곧 스팍의 발꿈치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들을 룸까지 안내하는 직원이 나가고 나서야 커크는 한숨을 지으며 모자를 벗었다. 스팍은 다소 미안하다는 감정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망자를 잊지 못해 안드로이드를 만들어 데리고 다니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세간의 웃음을 살 일이었다. 천하의 벌칸이 제 감정 하나 억제하지 못해 인형을 끌어안고 살다니. 참으로 이기적인 발상임을 자각하면서도 결코 누구에게도 알려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늘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사각 테이블의 한쪽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았다. 스팍은 묘하게 긴장을 하고 있었고, 커크는 그런 스팍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신 맥코이에 관한 이야기를 조잘거리며 기대감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스팍은 방금 전에 본 시계를 또 들여다 보며 어서 그가 나타나서 이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시켜 주기를 바랐다.
약속한 6시에서 5분가량이 지났을 무렵에 노크 소리와 함께 아까 두 사람을 안내했던 직원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로 맥코이가 따라 들어왔다. 스팍은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끼며 한껏 굳혔던 얼굴을 살짝 풀었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미안, 시간 계산을 잘못해서 약간 늦었네."
"아닙니다, 닥터. 우선 앉으시죠."

서둘렀는지 약간 헐떡이는 맥코이에게 스팍은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그러나 미처 그러기도 전에 커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맥코이에게 와락 안겼다.

"본즈, 이게 얼마 만이야! 이렇게 다시 보니까 되게 반갑네."

커크는 맥코이의 등을 친근하게 토닥이며 한껏 반가움을 표시했다. 맥코이는 갑작스럽게 닥친 상황에 당황한 듯, 그의 두 손은 갈 곳을 잃고 헤맸다. 그러다 이내 주춤거리긴 했지만 커크와 마찬가지로 그의 등을 감싸 안아 주었다. 품 안에서 느껴지는 모든 것 - 얼굴과 체격, 그리고 목소리 - 은 어떻게 봐도 그를 영락없는 제 친우, 제임스 커크라고 여기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기껏해야 짐, 하고 그를 불러보는 게 고작이었다. 한참 만에 커크가 떨어져 나가고 난 후에야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 착석할 수 있었다. 맥코이는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이었고, 스팍의 표정은 다시 약간 굳어졌으며, 커크만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흥분한 커크를 간신히 진정시키고 식사를 주문했다. 세 사람이 앉아 있는데 식사는 2인분만을 주문하자 직원은 의아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맥코이가 얼른 커크를 가리키며, 저 친구가 몸이 좋지 않아서 당분간 금식을 해야 한다고, 그도 이 레스토랑의 맛깔나는 음식이 무척이나 먹고 싶을 거라고 둘러댔다. 능청스러운 맥코이의 연기에 직원은 금세 안타까운 표정이 되어 커크를 돌아보며 그의 건강을 빌어 주었다.




"내가 고바야시 마루 테스트 세 번째로 도전한다고 했을 때, 완전 질색했었잖아, 킥킥."
"네가 여자 말고 다른 데에 그렇게 집착하는 거 처음 봤다니까. 그때 사실 너랑은 앞으로 거리 좀 두고 지내야겠다 싶은 생각까지 들었었다고!"

식사를 하지 않는, 아니 할 필요가 없는 커크는 스팍과 맥코이가 음식을 먹는 내내 끊임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처음에는 서먹해 하던 맥코이는 역시나 넉살이 좋아 새로운 커크와 마치 어제까지도 만났던 친구처럼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 내용은 주로 그들이 스타플릿 아카데미 생도 시절의 일화들이었다. 스팍은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가 많았기 때문에 좀처럼 끼어들지 못하고, 물론 끼어들 생각도 없었지만,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 누구더라, 우후라 룸메이트였던... 그녀가 아니었으면 그 테스트 통과도 못 했을 거야."
"그날따라 자신만만한 게 이상하다 싶었지. 믿는 구석이 있었던 거야. 테스트를 해킹할 생각을 누가 했겠어?"
"대체 얼마나 무모한 짓을 많이 하고 다닌 겁니까. 듣자 하니 제가 모르고 있는 사실이 더 숨겨져 있을 것 같은데요."

드디어 스팍이 그들의 대화 사이에 한마디 끼워 넣는 데에 성공했다. 커크가 프로그램을 해킹해 테스트에 조작을 가했다는 사실은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그 뒤에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알았다. 커크의 생도 시절을 훤히 알고 있는 맥코이는 웃음을 터트렸고, 그에게서 기억을 나눠 받은 커크도 킥킥댔다. 스팍은 그들이 가진 추억을 혼자만 공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우습게도 소외감을 느꼈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옛 기억을 되살리며 웃고 떠들었다. 스팍은 입맛이 싹 가셨다. 스테이크를 써는 손이 점점 느려지더니 얼마 가지 않아 식기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런 스팍의 불편한 심기를 먼저 캐치한 것은 옆자리에 앉은 커크였다. 그는 여전히 들뜬 채로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무래도 너랑 나만 아는 얘길 하니까 스팍이 조금 삐친 것 같은데? 우리 셋 다 아는 얘기를 해야겠어. 이를테면 엔터프라이즈호에 내가 처음 탔을 때 얘기 같은 거 말이야."

커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스팍을 제외한 두 사람은 다시 웃기 시작했다. 스팍은 드디어 자신도 함께 추억할 수 있는 화제로 돌아왔음에도 기쁘기는커녕 오히려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져만 갔다.

"그때도 무모했지. 그건 내 책임도 크긴 했지만. 그래도 그때 널 함선에 태우지 않았으면 다른 함선들처럼 우리도 우주에서 산산조각이 났을 거라고! 상상만 해도 끔직하지."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 파이크 함장님이랑 스팍이 어찌나 원망스럽고 밉던지, 답답해 죽는 줄 알았잖아. 풉, 스팍은 심지어 날 이상한 행성에 내던져 버리기까지 하고 말이야. 내가 그때 무슨 사고라도 당했으면 어쩔 뻔했어, 스팍?"
"그만하시죠."

낮게 가라앉은 스팍의 목소리가 떠들썩하던 룸 안을 순식간에 잠재웠다. 커크가 왜 그래, 스팍, 하고 그를 심기를 달래 보려 했지만 스팍의 태도에는 한 점 변화도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이 숨 막힐 듯한 분위기를 형성시킨 장본인인 스팍에 의해 깨졌다.

"타인의 기억을 제 것인 양 떠들어대는 것이 그리 즐겁습니까? 당신은 진짜 제임스 커크가 아니란 말입니다. 기억을 조금 나눠 가졌다고 해서 우리 사이의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마십시오."

스팍의 어조에서는 다소간의 분노가 읽혔다. 그러나 무엇에 대한 분노의 표출인지, 그것은 스팍 자신조차도 알지 못했다. 어쩌면 이런 기묘한 상황을 만들어버린 저 자신에 대한 분노가 가장 컸을지도 몰랐다. 말을 마친 스팍이 의자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때였다. 커크가 아까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를 냈다. 그것은 아주 침착하면서도 어딘가 상처받은 듯한 것이어서 스팍을 얼린 듯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 기억을 나눠준 건 바로 너희들이야. 내가 원해서 받은 게 아니라고."

스팍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의 말은 명백한 사실이었으므로. 커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길 바라서 기억을 준 게 아니었어? 마치 진짜 인간 커크가 존재하지 않았던 순간은 단 일 초도 없었던 것처럼 그 공백을 메우고 싶었던 것 아니었냐고!"
"... 짐."

간신히 목소리를 짜내 커크를 불렀지만, 그는 벽에 걸린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는 장식품에 시선을 고정한 채 스팍을 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맥코이는 자신이 낄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했기에 거의 자리에 없는 사람처럼 숨소리마저 낮추고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들었다. 커크가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난 이런 용도로 만들어진 거잖아. 내 효용을 최대한 이끌어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 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힘겹게 말을 마친 커크의 시선이 자신의 무릎으로 떨궈졌다. 스팍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남겨진 두 사람 중 아무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고 그대로 문밖으로 사라졌다. 가장 난감한 상황에 처한 것은 다름 아닌 맥코이였다. 그는 스팍에 대해서도, 커크에 대해서도 얼마간의 미안함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으므로, 스팍이 느꼈을 미묘한 소외감과 곁에 없는 커크에 대한 상실감, 그리고 새로운 커크에게서 느끼는 혼란이 뒤섞인 감정 상태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제가 해야 할 일을 충실하게 수행했을 뿐인 두 번째 커크에게도 어떠한 잘못이 없음을 알았다. 아무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각자가 가진 감정이 충돌하는 때가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한참 만에 고개를 든 커크의 눈가에 약간 붉은 기가 돌았다. 기계인 커크도 이런 때에 슬픔이나 서럽다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일까. 맥코이는 그가 어디까지 인간과 유사한 감정을 품을 수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




"오늘은 여기서 지내도록 해. 누구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 날이 있는 법이니까. 그가 이성과 논리로 무장한 괴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보자고."

뭐, 아마 내일쯤이면 냉정한 벌칸으로 돌아와 있겠지만. 맥코이는 커크를 제집 안으로 들이며 나름대로는 위안을 할 의도로 특유의 유머러스함을 섞어 말을 건넸다. 인간이 기계를 위로하고 있다는 점이 어딘가 이상하긴 했지만, 맥코이는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게 커크에게 어떤 효과를 가져다주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일단 거기 좀 앉아. 그... 널린 건 옆으로 대충 치우고. 조금 지저분하지? 어제도 휴일인데 불러내는 바람에 청소할 틈도 없다고. 이렇게 살 바엔 차라리 엔터프라이즈호에 다시 타는 게 나을 정도라니까."

풉,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드디어 아까처럼 웃고 떠들던 모습의 커크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제야 맥코이도 한숨을 돌리고 긴장을 늦췄다. 비록 몸은 바쁘게 집 안을 누비며 당장 눈에 띄는 어수선함을 정리하느라 바빴지만 말이다.
이윽고 대강의 정리를 마친 맥코이가 주방 테이블로 커크를 불러들였다. 싱크대에 딸린 찬장을 열자 각양각색의 주류가 즐비했다. 맥코이는 그중 하나를 꺼내고 유리잔을 두 개 준비하려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하나는 제자리에 되돌려 놓고 자기 몫의 잔 하나만을 가지고 테이블에 앉았다. 계속해서 맥코이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커크였으므로 그 장면을 놓칠 리가 없었다.

"같이 술 상대를 해줄 수 없게 돼서 유감이네, 본즈."
"덕분에 내가 마실 양이 늘었으니 행운이지."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픽, 웃었다. 이런 실없는 농이나 주고받고 있자니, 정말이지 옛날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맥코이는 제 잔에 술을 따라 홀로 공중에 잔을 들어 올리며 건배를 하는 시늉을 했다. 그에 맞춰서 커크가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커크는 원래 윙크를 잘 하지 못했는데, 그런 버릇마저도 똑 닮아 있어서 맥코이도 그만 기분이 이상해지고 마는 것이었다. 도수가 높은 알코올이 식도를 훑으며 내려가니,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드는 듯했다. 술잔을 내려놓으며 커크에게 물었다.

"... 할 만해? 스팍이랑 지내는 거 말이야."
"뭐어, 솔직히 말하자면 따분해. 얼마 전에 너무 답답해서 밖에 한 번 나갔다가 된통 혼났다고. 스팍이 출근하고 나면 주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애완동물이 된 기분이라고나 할까."

커크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의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활동적인 성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맥코이는 그의 고충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팍이 커크에 관한 한, 그토록 예민하게 구는 이유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일방적으로 누구 한쪽의 편을 들어주기가 어려웠다.

"힘들겠지만..."
"나도 알아, 이게 내 역할인 거. 차라리 얌전하고 고분고분한 성격으로 만들어줬으면 서로 편했을 텐데. 아, 그렇게 되면 제임스 커크가 아닌 딴사람이 되어버렸으려나?"

맥코이는 커크의 성격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으면서도, 기계로서의 본분 또한 잊지 않는 듯한 그의 발언에 적잖이 놀랐다. 스팍이 혼란스러워하며 감정의 요동을 겪는 이유를 이제 조금 알 것도 같았다.
그는 무거운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기로 하고 화제를 돌렸다. 그래 봐야 어차피 두 사람의 입에 오르는 것은 스팍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스팍은 요새 좀 어때? 아직도 수면제를 챙겨 먹나?"
"내가 온 후로 처음에 몇 번은. 최근엔 약통을 어디로 치웠는지 없어져 버려서 안 보이지만."

흐음, 맥코이가 콧소리를 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수면제를 끊었다는 건 결코 나쁜 징조가 아니었다. 그는 목소리를 약간 낮추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희의 사생활을 캐내려는 건 아니고, 다만 의사로서, 의학적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 묻는 건데... 혹시 잘 때 따로 자나?"
"아니, 스팍 침대에서 같이. 내 방이랑 침대도 따로 내어 주긴 했는데 어차피 난 잘 필요도 없고 또..."
"또...?"

갑자기 말끝을 흐리는 커크 때문에 맥코이는 궁금증으로 몸이 달았다. 재촉하듯 그의 말꼬리를 잡아 똑같이 되물었다.

"잘 때 종종 악몽을 꾸는지 괴로워하길래 옆에 누워서 다독여 주니까 금세 잠잠해지더라고. 그 후로는 계속 같이 자. 물론 난 안 자고 옆에 있는 것뿐이지만, 어쨌든 말이 그렇다는 거야."

큼큼, 커크는 황급히 말을 끝내고는 헛기침을 하는 척했다. 그에게도 하기 민망한 이야기쯤은 있으리라, 맥코이는 속으로 웃어넘겼다. 그리곤 자못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앞으로도 잘 좀 부탁해. 본인 앞에선 입이 찢어져도 못 할 말이지만, 그... 스팍도 나한테는 소중한 사람 중 하나니까."
"물론이지.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내가 필요 없어질 때까지 잘 지내보려고 노력할 거야."

자신의 처지를 아주 정확히 알고 있는 듯한 커크의 말에 맥코이는 그만 그에게서 시선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씁쓸한 생각을 지우기 위해 빈 잔을 채우려 술병에 손을 뻗었지만, 맥코이보다 커크가 먼저 그것을 낚아챘다. 커크는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띠며 그의 잔에 술을 따랐다.


맥코이의 앞에 놓인 잔은 빠르게 비워져 나갔다. 그리고 잔이 빌 때마다 커크가 계속해서 그것을 채워 주었다. 맥코이는 술을 흘려 넣을 때를 제외하곤 입을 열지 않았다. 커크도 그의 침묵에 동참했다. 고요한 가운데 맥코이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가 당초에 기대한 것보다 스팍의 상태가 훨씬 빠르게 좋아지고 있는 듯했다. 커크가 관찰한 결과로도 그래 보였고, 실제로 커크를 데려온 이후로는 병원에 상담을 하러 오지도 않았다. 이대로 가면 금세 스팍이 입은 마음의 상처가 아물게 되리라. 거기에 생각이 이르자 제 앞에 앉은 커크의 처분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효용가치가 떨어진 물건은 더는 소유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것은 커크의 말대로 아직 언제가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무겁고 우울한 생각을 흩어버리며 다시금 술잔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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